구룡성채는 홍콩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았던 곳입니다. 1993년에 철거되기 전까지 24,000 평방미터의 작은 땅에 5만 명이 살았습니다. 이곳은 법이나 정부의 통제가 없었기 때문에 범죄와 불법이 만연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따뜻하고 활기찬 이웃들이 살았습니다. 구룡성채의 흥미로운 이모저모에 대해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시고 과거 홍콩으로의 여행을 떠나보시기 바랍니다.
목차
구룡성채의 탄생
구룡성채는 제1차 아편전쟁 때 중국이 영국에게 넘겨준 홍콩의 일부였습니다. 당시 중국 정부는 홍콩을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구룡만 건너편에 작은 요새를 지었습니다. 이 요새가 바로 구룡성채였습니다. 당시의 이름은 구룡채성이었습니다.
제2차 아편전쟁 때 중국은 홍콩을 영국에게 99년간 임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룡성채만은 중국 영토로 남아있었습니다. 이렇게 중국도, 영국도 개입하지 않는 지역이 되면서 구룡성채는 정치적으로 독특한 곳이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구룡성채를 점령하고 성벽을 손상시켰습니다. 이후 일본이 항복하고 영국이 홍콩을 다시 잡았는데, 이때부터 새로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중국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수천 명의 난민들이 구룡 반도로 몰려왔는데, 영국 정부가 떠나라고 해도 안 떠나면서 점점 인구가 늘어났습니다. 1948년까지 영국은 이러한 구룡성채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점차 거대해진 구룡성채
정치적으로 독특하면서 불안정했던 구룡성채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건축 열풍이 일어나며서 불법으로 건물을 증축하여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시점에 삼합회라는 범죄 조직이 이곳을 지배하면서 70년대에 영국 정부가 몰아내기 전까지 여러 가지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이미 인구 밀도가 엄청 높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살 집을 만들기 위해 건물과 집을 계속해서 쌓아 올렸습니다.
구룡성채는 건축적으로도 매우 독특해졌습니다. 약 2만 4천 평방미터 정도 되는 작은 땅에 수백 개의 건물이 서로 붙어있었습니다. 도시 안은 너무 좁았지만 건물 사이는 모두 길이나 계단, 판자, 사다리 등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땅을 밟거나 하늘을 볼 필요 없이 도시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도시의 건물들은 주민들이 계속해서 바꾸고, 고치고, 추가하고, 없앴습니다. 그곳은 완전히 자유롭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면서 스스로 자랐습니다.
건물이 점점 많아지니 구룡성채의 내부는 굉장히 어두워졌습니다. 중앙부로 갈 수록 빛은 거의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둥어로 ‘어둠의 도시’라는 뜻인 ‘학남’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약 350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이곳에는 방이 8,500개 이상이나 되었고 10,700 이상의 가구가 살았습니다. 그래도 각 가구에 전선과 수도는 필요했다 보니 전선과 파이프, 각종 케이블, 발코니, 벽 등응 엉망으로 섞이고 엉켜있었습니다.
구룡성채 안에는 집, 상점, 작은 공장, 식당, 도살장, 사회 센터, 지역 단체 등이 있었고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처럼 운영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보통의 지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다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고, 전혀 관리되지 않은 모습이었으며, 더욱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습니다.
삼합회가 사라지고 나서도 구룡성채는 홍콩의 다른 곳에서 적용되고 있는 법률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곳곳에는 면허가 없는 의사와 치과의사들이 값싸지만 엉망인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안으로 더 들어가보면 도박장, 스트립 클럽, 매음굴, 마약 거래소, 성인영화관 등이 가득했습니다. 건축 규제도 없었고, 도시의 인구를 정확하게 조사할 수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구룡성채 내부의 복도나, 지붕 위에 있는 작은 골목에서 법을 집행하는 것은 위험하고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외부인은 도시 안에서 길을 잃기 쉬웠고 내부 골목은 언제나 수십 명의 사람들로 둘러싸여 꽉차있었습니다.
구룡성채는 하지만 영국과 중국 정부의 간섭이 전무했고 법이 적용되지 않았기에 스스로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그래도 ‘사람 사는 곳’
구룡성채는 당시 세상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었고 더러운 공기, 불결한 복도,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해충과 범죄자들이 들끓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하고 활기찬 일상을 살았습니다. 거리와 건물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아이들이 술래잡기와 숨바꼭질하기 좋았고, 옥상에서 할 수 있는 재미있는 놀이도 많았습니다. 집 위에 집이 쌓아지고 새로운 층이 생겨나면서 주민들은 우물을 파고 파이프를 더 연결해서 새로 지은 가구에도 물을 공급해주려 했습니다. 인구 밀도가 높다 보니 물을 옥상 탱크로 펌핑하는 데 전기가 많이 든다는 것을 알게된 후부터 주민들은 모두가 물을 쓸 수 있게 하기 위해 집에서 전기를 아끼기도 했습니다.실제로 구룡성채에 살았던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면 구룡성채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돕고 아껴주면서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구룡성채는 다양한 제품을 만드는 거대한 공장이기도 했습니다. 구운 고기, 어묵, 인형 부품, 골프공 등 다양한 제품이 이 안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구룡성채 주민들이 만든 제품은 홍콩 전역에 팔렸고, 이후에는 중국 본토 및 세계 여러 나라로 수출되기도 했습니다. 바로 앞 거리에는 이색적인 음식을 파는 노점상들도 많아졌습니다. 많은 미식가들이 이색적인 맛을 찾아 구룡성채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구룡성채의 종말
구룡성채는 40년 넘게 정부의 관심을 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민들도 언젠가는 정부가 다시 나타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987년 1월 14일 아침, 주민들이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갑자기 구룡성채 철거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홍콩 주택부 공무원 400명이 구룡성채에 들어와 거리와 골목에 경계선을 긋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각 가정의 문을 두드리면서 주민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주민들에게 보상을 제시하면서 퇴거를 설득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오간 이후 시점에 보상을 받기 위해 구룡성채로 이사 오는 사람들도 막아야 했습니다. 구룡성채는 이렇게 인구 조사를 위해 약 6개월 간 공무원들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협상이 계속되는 동안 홍콩 정부는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27억 6천만 달러를 줄 거라고 했습니다. 아파트 하나당 38만 달러를 받을 수 있었고, 정부가 제시한 조건을 수락한 주민들은 1991년 11월까지 구룡성채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이를 수락하지 않은 주민에 대해서는 국가가 쫓아내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구룡성채를 둘러싼 철조망이 세워졌습니다.
구룡성채의 마지막 날, 철구로 8층짜리 건물 하나를 부수는 것으로 구룡성채의 공식적인 철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옛 주민들은 울면서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1994년 4월까지 철거가 계속되었고 구룡성채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구룡성채를 기억하며
구룡성채가 철거된 후 홍콩 정부는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구룡 성벽 도시 공원이라고 부르는 이 공원은 1995년에 완성되었고, 12월에 사람들에게 열렸습니다. 구룡성채의 문화적 유산을 살리기 위해 여러 가지 배려도 했습니다.
중국의 강남 정원을 본뜬 이 공원은 8개의 조경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공원 안의 산책로와 파빌리온은 구룡성채의 옛 거리 이름을 따왔습니다. 구룡성채의 역사를 알려주는 전시실에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옛 행정 사무소와 도시 남문의 잔해도 복원해서 기념물로 만들었습니다.
구룡성채는 이곳 공원 외에 영화와 각종 미디어 안에도 살아있습니다. 다양한 전시회,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 등이 구룡성채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배트맨 비긴즈라는 영화에 나오는 고담의 빈민가인 내로우스는 구룡성채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콜 오브 듀티라는 게임에는 구룡성채를 바탕으로 한 레벨이 있습니다. 일본에는 5층짜리 아케이드 건물인 웨어하우스 가와사키 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는 구룡성채가 실제 크기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방문객들은 형광으로 된 간판, 골목길 등을 보면서 구룡성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구룡성채 사진집
구룡성채가 사라지기 전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을 사진으로 생생하게 남겨둔 사진 작가가 있습니다. 그레그 지라드라는 캐나다 사진작가인데, 이분이 공개한 구룡성채 사진집을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치며
구룡성채는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디스토피아였지만 그곳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범죄와 공동체 정신이 공존했던 과거의 홍콩을 상기시켜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역사이긴 합니다. 비록 철거되기 전에는 평판이 나빴지만, 그 평판 덕분에 구룡성채는 오랫동안 기억될 것으로 보입니다.